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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흉상 프로필 나무위키 정보

큰손강선생 2023. 9. 3. 23:55

오늘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으로 정치계 이슈가 되고 있는데 다 빼고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만 알아보자

 

 

홍범도 앞모습

홍범도

출생 1868년 8월 27일 음력

평안남도 평양

1943년 10월 25일 사망

호 여천

별칭 범도

활동분야 독립운동

 

일명 범도라고도 하며, 호는 여천이다. 1868년 8월 27일 평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갑산으로 이사한 뒤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해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 태양욱, 송상봉, 허근과 함께 산포대를 조직한 뒤 삼수·갑산 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을 대적해 북청·후치령을 중심으로 갑산·삼수·혜산·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격파했다. 이 싸움에서 그는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했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 점령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 다음 해 부하 박영신으로 하여금 함북 경원의 수비대를 습격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 갑산·혜산·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해 전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만포진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했다.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해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해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했다. 이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제1연대장으로 참가해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독립운동단체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됐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해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자유시사변을 통해 많은 독립군이 희생되고 말았다. 이후 홍범도는 남은 독립군 부대와 함께 이루쿠츠크로 이동했고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설립된 고려혁명군관학교에서 혁명군 이만으로 돌아왔고 2023~24년 무렵부터는 그곳에서 콜호스(집단농장)을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37년 스탈린이 한인강제이주정책을 시행하면서 연해주의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홍범도는 카자흐스탄과 야니쿠르간 사니리크로 이주했다가 이듬해 크질오르다에 정착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정부에 참전을 요청했지만 고령을 이유로 거부당했다.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기치>에 젊은이들의 참전을 촉구하는 기고문을 싣기도 했다. 말년에는 한인 극장인 '고려극장'에서 수위로 근무하는 등 비교적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그렇지만, 카자흐스탄 한인 사회에서 독립군 장군 홍범도의 영웅적 업적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생전에 이미 고려극장에서 그의 항일투쟁을 주제로 한 연극 '홍범도'가 공연됐고 그의 일대기가 <홍범도 일지>로 정리됐다.

 

조국 해방을 불과 2년 앞둔 1943년 10월 25일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끝내 숨을 거뒀다. 그의 유해는 집 근처에 임시로 안장됐다가 2차 대전이 끝나고 중앙공동묘역으로 옮겨졌다. 1951년 <레닌기치>기자들을 비롯한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홍범도 장군 분묘수리위원회'를 조직해 묘를 보수하고, 흉상과 기념비를 세웠다. 그가 거주하던 집은 크질오르다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됐고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 거리'로 지정됐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했다. 2019년 4월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토카예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장군의 유해 봉환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2021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유해가 봉환됐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 중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 했고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