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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호 국회의원 프로필 학력 부인 재산 나이

큰손강선생 2022. 6. 13. 17:34

오늘은 우상호 국회의원 프로필에 대해 알아보자

 

 

우상호 앞모습

우상호 프로필

1962년생 12월 12일 호랑이띠

강원도 철원 출생

키 175cm

부인 이현주

아들 우종혁

아들 우종하

딸 우지수

학력

용문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공공정책 석사과정

수상내역

2006년 제8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신사상

2012년 제11회 대한민국을 빛낸 21세기 한국인상

2014년 국정감사 NGO모니터단 국정감사 우수의원

2015년 일치를 위한 정치포험 제5회 국회를 빛낸 바른언어상 상임위 모범상

경력사항

1987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동우회 회장

1994년 도서출판 두리 대표

1994년 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

1994년 월간 '말' 기획위원

1997년 비디오그래픽스 전무이사

2001년 미국 콜로라도주립대학교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2003년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2004년

2007년 제17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2006년 열린우리당 대변인

2007년

2008년 제17대 대통합민주신당 국회의원

2008년 통합민주당 대변인

2009년

2010년 민주당 대변인

2012년

2013년 제19대 국회의원(서울 서대문구 갑/민주통합당)

2013년

2014년 제19대 국회의원(서울 서대문구 갑/민주당)

2014년

2015년 제19대 국회의원(서울 서대문구 갑/새정치민주연합)

2015년

2016년 제19대 국회의원(서울 서대문구 갑/더불어민주당)

2016년

2020년 제20대 국회의원(서울 서대문구 갑/더불어민주당)

2022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비상대책위원장

 

 

1962년 12월 12일 우상호는 강원도 철원군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철원 동송초등학교 재학 중 서울로 상경하여 광운중학교, 용문고등학교,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원래 우상호의 집안은 부유했다. 아버지는 지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도쿄제대 체육학과 유학을 떠날 정도였다. 하지만 38선이 그어진 후 우상호의 집안 재산은 공산당에게 빼앗긴다 6.25 전쟁으로 국군이 철원의 일부 지역을 회복한 후에 우상호 집안은 일부 땅을 돌려받는다. 우상호의 아버지는 일부 되찾은 땅을 팔아 학교를 짓는 등 사회사업을 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고 몰락하고 만다. 

 

형제들은 모두 성적이 좋았는데 진학을 포기한 것도 가난이 이유라고 밝혔다. 우상호도 대학에 들어가지만 등록금이 없어 대학시절 내내 고생을 했다. 우상호는 일찍부터 시인을 꿈꿨는데 집안의 기대와 달리 국문과로 진학하면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재학 시절 오월 문학상(5.18 문학상) 시 부문 당선, 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을 감안하면 시 쓰는 여고 선생님이란 목표대로 흘러갔을 수도 있었다

 

우상호는 원래 민주화운동을 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국민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글을 쓰는 문예반에 들어갔다 그리고 군대 전역 후에는 운동권과 멀어지면서 취업을 준비하는 게 일반적인 운동권 대학생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상호는 다른 운동권 학생들과는 이례적으로 군 복무 중에 학생운동을 결심하고 제대 후 사회과학 세미나에 참여한다 문학 친구였던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먼저 학생운동에 뛰어들면서 우상호에게도 영향이 갔다고 한다. 등록금이 없어 입대한 후 나온 휴가에서 박래군이 강제징집당한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우상호는 '84 국문과 강타'라는 가명으로 3년 후배들과 함께 조를 짜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후배들과도 격의 없이 지내는 계기가 된다. 당시 학생운동은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것에 반해 매우 특이한 케이스로 평소 성품을 알 수 있다

 

 

우상호는 1988년 총선에서 김대중에게 직접 평화민주당 영입 제한을 받게 된다. 양김 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된 후 김대중은 새 인물을 영입해 서울에서 출마시킬 계획을 세웠는데 이때 영입된 인사가 이해찬이다. 김영삼이 노무현을 영입한 시기도 88년이기에 우상호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당시 나이도 만 25세 4개월이어서 민주화 이후 통틀어 역대 국회의원 최연소로 당선된 김영삼(당시 만 26세 5개월)의 기록도 깼을 것이다. 하지만 우상호는 이 제의를 거절하는데 1987년 대선에서 양김 단일화를 요구하다 실패한 책임감을 이유로 들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6.10 항쟁을 촉발한 학생운동 지도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는데 우상호는 결국 88년 검문에 의해 검거되어 국가모독죄를 이유로 수감되고 발이 묶였다. 언론게와 출판사업에 종사하던 우상호는 95년 민주당의 서울시장 선거를 지지하며 정치 입문 단계를 밟는다 5년 후 우상호가 출마를 준비한 서대문구 갑 지역구는 김상현 의원이 당선되던 지역구로, 김상현은 이례적으로 정치신인인 우상호의 출마도 환영하며 경선을 요구한다. 당시 새천년민주당 지도부는 여론조사로 경선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 우상호가 승리한다

 

우상호는 이례적으로 대변인을 여덟 번이나 했다. 대변인은 언론 노출도가 올라가는 장점이 있으나 높은 업무강도로 인해 여러 번 하는 경우가 드물며, 거기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여러 번 맡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덕분에 당을 위해 희생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대변인을 자 하면서 우상호는 다른 86그룹 정치인들과 선명성을 강조하는 의정활동을 하지만 다른 정치인과 달리 유연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86 운동권 중에서 언론과 폭넓게 소통하는 몇 안 되는 인사이다

 

2022년 6월 7일 더불어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20대 대선의 총괄 선대본부장을 하여 대선 패배에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그 수습을 맡기는 것에 논란이 있긴 했지만 정세균, 문희찬, 유인태 등 당내 원로들과 이광재, 김부겸 등의 중진급 인사들이 위원장직을 거부하면서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우상호 의원에게 자리가 돌아간 것이다.

 

의원총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를 받아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현재 민주당의 상황을 보면 꽤나 중책을 맡은 셈인데 앞선 세 번의 패배를 분석하고 당내 분란을 수습해야 하기 때문이다. 별다른 변화가 없으면 차기 전당대회까지 약 2-3개월가량 자리를 맡게 된다. 임무에 비해 기간이 짧긴 하지만 난국을 그런대로 잘 봉합한다면 총선 불출마 선언에도 불구하고 추후 정치적인 활로가 모색될 수도 있다.

 

 

우상호 62년생 호랑이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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